노동법에 묻는다

by 센터 posted Feb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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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센터 부소장

 

 

아버지뻘인 노동자는 무려 23년 동안 작은 빌딩의 관리자로 혼자 근무했다.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는 그 오랜 기간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며, 사회보험은 마지막까지도 가입되지 않았다. 노동자는 입주자들이 출근하기 전인 8시에 출근해서 엘리베이터 전원을 켜고 계단과 옥상, 건물 주변을 청소했다. 식당가에 건물이 있던 터라 행인들이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는 일이 많았는데 이를 감시하는 것도 노동자의 역할이었다. 사무실이나 휴게실도 없어서 엘리베이터 하부 피트에 직접 가져다 놓은 책상을 놓고는 그곳에서 식사도 하고 잠깐씩 대기했다. 혼자서 건물 관리를 하다 보니 입주자들이 수시로 하는 문의나 요청에 응대하기 위해 노동자는 점심을 거르는 일도 많았다. 그런데 사용자는 월급으로 100만 원만 줬다.

 

노동자는 퇴직금이라도 제대로 받아야겠다며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렇게 자료가 없는 사건은 근로시간을 확정하는 것이 어렵다. 사용자는 노동자 출퇴근 시간이나 근무시간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발뺌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혼자 일하다 보니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증언해줄 사람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사용자가 자신은 그렇게 시킨 적이 없다며 지휘·감독을 부정하면 어렵게 준비해서 신고해도 해결은 난망해진다.

 

그나마 노동자가 가지고 있던 최근 근로계약서가 있어서 사건을 진행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노동자가 보여준 근로계약서에는 휴게시간이 공란이었다. 그것도 작성 당시 사용자가 근로계약서를 교부하지 않아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공란으로 작성된 근로계약서는 사용자가 나중에 그 공란을 채워오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문서 위조 여부는 노동청에서 다루지 않아 얼핏 눈으로 봐도 명백한 위조가 아니라면 노동청은 제시된 근로계약서만을 보고 판단해버린다. 공란으로 된 근로계약서 양식을 출력해 손으로 기재하는 방식도 많이 활용되다 보니 문서 위조를 확인받기란 사실상 어렵다. 불안한 생각이 컸지만 다른 증거를 더 확보해보기로 했다. 어찌 됐든 8시 출근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용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으로 확정돼도 지금의 급여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었고, 휴게실도 없고, 휴게시간을 특정하지 않은 채 수시로 입주민의 민원을 처리해야 하는 작업 환경을 근거로 사실상 휴게시간을 제대로 부여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사용자가 하루 3시간 30분의 휴게시간을 적어 놓은 근로계약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 계약서는 노동자에게 교부한 적도 없었고, 노동자가 촬영했던 근로계약서와도 다른 계약서였다. 이 계약서대로라면 노동자가 받지 못한 피해액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약간의 미지급금이 발생한 정도가 되어버린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제출했다는 근로계약서에 크게 분노하면서 사용자에게 근로계약서를 달라고 했지만, 사용자는 노동청에만 제출할 뿐 노동자에게 제시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공식적으로도 근로계약서를 교부할 것을 요구했지만 무시당했다. 노동자는 결국 근로계약서 미작성과 미교부에 대해 추가로 노동청에 신고했다.

 

근로기준법 제17조에서는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임금과 노동시간 등 주요 노동조건을 서면으로 명시해 노동자에게 교부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만일 사용자가 이를 어기면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근로감독관집무규정 별표3에서는 위반 시 시정 기간을 14일 부여하고 그 기간에 시정하지 않으면 범죄를 인지하여 수사하도록 하고 있다. 노동청에서는 23년 중 최근 3년을 제외하고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도, 근로계약서를 교부하지 않은 것도 확인했지만 이상하게도 고의성을 확인하기 어렵고 법 위반을 단정하기 어렵다며 검찰의 수사지휘를 통해 ‘혐의없음’으로 끝났다.

 

최근 검찰의 수사지휘가 증가하고,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 명백한 법 위반 행위에도 “고의성을 조사하라”는 바람에 근로감독관 업무가 늘고 있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임금명세서를 주지 않은 사용자에게 과태료 처분을 한 비율이 1.2%에 불과하다는 최근 언론 보도도 이와 같은 맥락인 것 같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이념으로 구체화한 시민법 체계에서는 불법행위의 고의나 과실을 범죄인정의 중요한 요건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은 온전하게 자유롭지 않고 평등하지도 않다. 이런 불평등 속에 개인의 고의로 발생한 피해가 아닌 구조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사회법 체계가 등장했고, 노동법은 바로 사회법의 대표적인 법이다.

 

노사관계라는 위계적이고 종속적인 틀에서 사용자의 불법행위 의사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이유로 기업이라는 구조 속에서 불법행위가 발생하면 그 구조를 운영하고, 구조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사용자가 불법행위 책임을 지라는 것이 노동법의 오랜 논의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법은, 아니 우리나라 노동법을 집행하는 자들은 다시 그 오랜 노동법의 논의를 되돌리고 있다. 다시 사용자의 고의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나는 노동법이 그런 법인지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법은 조문 내용만으로는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 법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와 배경, 그 속에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의 목적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법의 목적에 맞도록 법이 만들어졌는지, 또 법의 목적에 맞게 법이 집행되고 해석되고 있는지까지 입체적으로 접근해야 온전하게 법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온전한 이해를 하라고 법조인이라는 직업이 있고 국민이 세금으로 월급을 준다.

 

물론 “백 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말라”는 법언法彦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노동법을 위반한 사람이 모두 악인이고 그들에게 엄한 단죄가 필요하다는 말도 아니다. 적어도 노동법을 다루는 집행자들은 어떤 부분에서 사용자의 고의성을 확인해야 하고, 어떤 부분에서 고의성을 추정해야 하는지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의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혐의없음 처분이 늘어날수록 사용자들은 이것을 ‘노동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이라는 시그널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일터에서는 노동법 위반으로 인한 갈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법을 그 취지에 맞게 집행하는 것이 범법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법 위반을 줄이고 소위 ‘건강한’ 노사관계를 만드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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