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유니온 합시다_조건준 회원, 아유 대표

by 센터 posted Dec 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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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이 조건준 센터 회원, 아유 대표

* 인터뷰어 배병길 센터 상임활동가 

 

사본 -조건준.jpg

 

이번 《비정규노동》 158호 회원 인터뷰에서는 조건준 회원을 만났다. 그는 아유 대표이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이하 비정규센터) 교육위원회 위원이다. 그리고 비정규센터 사무실을 함께 사용하는 식구이기도 하다. 그가 비정규센터에서 셋방살이한 지는 반년 정도 됐다. 같은 사무실에서 지내다 보니 그와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었다. 그의 말은 진솔하고 번뜩였다. 무릎을 치게 만들 때가 많았다. 이번 인터뷰 역시 흥미로웠다.

 

완도와 광주의 기억

 

그는 완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김이나 미역을 양식하는 전형적인 섬마을이었다. 완도엔 여러 개의 섬이 있는데, 그가 살던 곳은 그중의 하나다. 큰 섬에 있는 읍내에 가려면 노 젓는 배로 왕복 8시간 걸렸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섬에 전기가 처음 들어왔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육지를 밟았다.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완도에는 수산고등학교밖에 없었다. 공부를 더 하려면 육지로 가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하기 바로 전해에 광주항쟁이 있었다. 광주는 여전히 암울한 분위기 속에 잠긴 상태였다. 사람들은 애써 그날에 관한 말을 아꼈다. 군사독재 시대인 데다가 상처가 워낙 컸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그날의 기억이 튀어나왔다. 광주에서 보낸 3년은 그의 머릿속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세상을 바꿔보자!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그는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의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었다. 5월이면 가슴이 이상해졌다. 집단으로 공유된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가 살던 곳은 구로공단 인근이었다. 그는 소위 ‘공순이’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이 역시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구로공단이라는 구체적 현실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세상을 바꾸는 길과 출세의 길 사이에서 실존적 고민을 했고, 결국 전자를 선택했다.

1985년, 부평에 있는 한 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발각되었고 학교로 돌아갔다. 그 뒤 민주화 운동에 몸담았고 격렬한 투쟁으로 인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계속된 도피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탓에 비밀 활동에 가담했다. 현장 노동자들을 만나 교습했고,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서 1993년까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신분이 복원되고 뒤늦은 30세에 군에 입대했다.

그는 인생이 순탄한 적이 없었다며 한탄했다. 대학은 중퇴하고, 수배 중에 결혼했으며, 늦은 나이에 입대하고···. 그리고 그는 늘 주위를 경계하며 산 데다 생활이 불규칙한 탓에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다. 신혼초에는 라면 사 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궁핍한 적도 있었다.

 

대공장 운동에 뛰어들다

 

제대 후 대공장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도 대공장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대공장에 현장 조직을 만드는 사업에 힘썼다. 건강한 활동가들을 모아 민주노조가 옳게 나아갈 수 있게 돕는 활동이었다. 이때의 인연을 바탕으로 그는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에 상근하게 되었다. 그 후 현총련이 금속노조로 통합되면서 금속노조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금속노조에서 기획국장·조직국장정책실장·단체교섭실장 등 여러 역할을 맡았다. 주된 담당 분야는 자동차 산업이었다. 97년 기아차 투쟁, 98년 현대차·만도투쟁, 2001년 대우차 투쟁, 그리고 2009년 쌍용차 투쟁까지, 그는 한국 노동운동사에 페이지를 장식한 굵직한 투쟁들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선망과 원망, 의의와 한계

 

그는 대공장 노조를 이야기하면서 ‘선망과 원망’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을 언급했다. 대공장 노조는 성공했다. 조합원들의 임금도 지위도 올랐다. 노조를 폄하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랬든 아니든 ‘귀족노조’라는 말을 듣는다. 현대·기아차에서 채용한다고 하면 지원자가 몰린다. 입사 비리까지도 벌어진다. 선망하는 것이다. 동시에 원망도 있다. 단순히 내가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조가 사회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기대와 그렇지 않은 현실 사이에서 오는 괴리에서 비롯된다.

그는 노동운동을 돌아보며 잘한 점과 아쉬운 점을 하나씩 꼽았다. 엄혹한 시절, 갖은 고초를 겪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싸운 건 부정할 수 없는 빛나는 기억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면서도 넘지 못한 장벽을 이야기했다. 87세대는 민주화와 더불어 한강의 기적을 맛봤다. 경제가 계속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IMF가 터졌고, 대마불사라고 여겼던 대기업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성장기가 지나 수축기가 찾아왔다. 우리 사회는 수축기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밥그릇이 사라지면서 생존 본능이 움텄다. 경쟁이 극심해졌다.

성장이 곧 성숙을 의미하진 않았다. 성숙을 이끌어내야 할 노동운동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물론 변화된 상황을 돌파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개별 기업노조로 각개격파 당할 게 아니라 산별노조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더해 정당을 만들어 정치 세력화 구축도 시도했다. 이러한 양날개론에 그는 깊게 동의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가 겪은 현장에서 노동자 개개인이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이 더 중요해 보였다.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금속노조 중앙에서의 활동을 접고 지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대로 운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노동자 중 일부만 노조할 권리를 누리는 현실을 타개해야 했다. 무노조 사업장, 비정규직 공장 등에 뛰어들어 조직화에 힘썼다.

그는 《노멀 레볼루션》이라는 책에서, 평범한 시민이 중심이 되는 혁명을 강조했다. 그 혁명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마디마디를 바꾸는 것이다. 보수는 경제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래서 다루기 쉬운 작고 무능한 정부를 원한다. 경제우선주의다. 반대로 진보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통해 경제 권력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정치우선주의다. 그런데 그가 꿈꾸는것은 경제도, 정치도 우선이 아니다. ‘사회우선주의’다.

우리는 흔히 정치, 경제, 사회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회가 뭐냐고 물으면 잘 대답하지 못한다. 그는 여기에 심각한 맹점이 있다고 봤다. 정치는 권력을, 경제는 이익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권리를 추구해야 한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친구·지역·노조 등으로 확장되는, 권력이나 이익이 아니라 상호 존중하며 정을 나누는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정치만 비대해서도, 경제만 비대해서도 안 된다. 정치, 경제, 사회가 앙상블을 이뤄야 한다. 정치는 정당이, 경제는 기업이 주체다. 그리고 사회는 시민단체나 노조가 주체다. 사회 영역이 지금보다 강화되기 위해서는 더 풍부한 시민단체, 더 높은 노조 조직률이 필요하다.

 

새로운 노조, 새로운 개념

 

그는 1980년대는 노동운동 태동의 시기였고, 1990년대는 시련의 시기였으며, 2000년대는 후퇴와 아픔의 시기라고 했다. 그리고 2010년대는 새로운 모색의 시기였으니 2020년대에는 노조 개념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고 봤다. 노조가 사회 영역에서 자기 위치를 명확히 할 때라는 것이다. 그는 향후 10년을 노조의 새로운 비전을 만드는데 투자하고 싶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아무나 유니온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아 ‘아유’를 만들었다.

노조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어떻게 할까? 노조를 시작하려 할 때 생기는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 공포를 넘으면 배포가 생긴다. 공포를 배포로 바꿔내는 건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부딪치는 길밖에 없다. 조직 활동이 역량을 집중해야 할 지점이다. 그리고 노조가 훨씬 발랄해져야 한다. 항상 엄격하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가볍게 노조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노조를 만들고, 운영하고, 즐길 수 있는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기업이 R&D에 투자하듯 말이다.

 

절실한 글쓰기

 

그는 《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라는 책도 저술했다. 운동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펜을 잡았다. 2009년 쌍용차 투쟁 때 기시감이 들었다. 2001년 대우차 투쟁 때처럼 또 아까운 목숨이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그 순간, 투쟁을 기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농성 현장에서 밤잠을 줄여가며 글을 썼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진 않는다. 지금도 글을 쓰는 게 힘들다고 했다. 게다가 글은 말과 달리 흔적이 진하게 남으니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쓴다. 절실함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글감을 얻는다. 현장의 분위기를 몸소 느끼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글감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현장에 나가는 걸 좋아한다. 그가 아이디어를 얻는 두 번째 창구는 책이다. 현장이 직접 체험이라면 책은 간접 체험이다. 그는 책·드라마·영화 등 여러 콘텐츠를 즐긴다(그는 《비정규노동》 ‘책(영화, 드라마) 만나기’ 꼭지를 연재하는 필자다). 그는 글감을 얻는 세 번째 창구로 동료와의 상호작용을 꼽았다. 이는 현장과 비슷하다. 동료와 술을 먹다가도 글감이 떠오르면 기록한다. 현장에서, 책을 읽다가 그러듯. 글을 쓰게끔 생활이 체계화되어 있는 것이다.

내년에 그는 새로운 책을 낼 예정이다. ‘노조는 이런 것이어야 된다’는 생각이 담길 거라고 하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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