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이자 실직기가 가장 바쁘다

by 센터 posted Feb 2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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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지난해 3월부터 시작했던 군청 기간제 일자리가 계약 기간 만료로 2020년 12월 31일에 끝났다. 원래 3월 말부터 9월 말까지 계약했는데, 12월까지 연장되어서 석 달 더 일했다. 덕분에 추운 겨울이지만 구직급여를 받으면서 따뜻하게(?)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뉴스를 보니 고용보험을 악용해서 매년 딱 180일만 일하고 4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아먹는 얌체족이나 도덕성이 해이한 사람들이 많다는 기사가 나온다. 겉으로만 보면 딱 내 얘기지만 난 얌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덕적 해이가 심한 사람은 더욱 아니다. 최저임금이지만 더 일하고 싶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퇴직하고 있을 뿐이다. 벌써 입춘이 지나서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꽃피는 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찾아봐야 한다.

 

하우스.jpg

폭우에 뻘흙과 모래로 뒤덮인 하우스 정비

 

구직급여가 나오고 농사일이 없는 겨울이라고 해서 마냥 집에서 노는 건 아니다. 돈은 한 푼도 안 들어오지만 정말 눈만 뜨면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있다. 아내가 출근하기 전에 일어나 아침밥을 대령하고, 출근하고 나면 집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해야 한다. 맘속에는 늘 할 일이 우선순위를 바꿔가면서 서로 먼저 해달라고 난리다. 무너진 논둑 축대 쌓기, 폭우에 뻘흙과 모래로 뒤덮인 하우스 정비, 텃밭도 넓혀야 하고 약초도 캐러 가야 한다. 집 뒤편 옥외수도에 창고를 만들고 지붕도 씌워야 한다.

 

그중에 시기적으로 봄이 오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만 떠올려 보면 우선, 뒷마당을 정리해서 대여섯 평 크기 텃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뒷마당은 뒷집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실상 뭣에 쓰기도 어려운 땅이다. 조경수나 큰 나무를 심게 되면 뒷집에 바로 그늘을 지우게 되니 그럴 수도 없고, 창고를 지으면 그 집 거실 풍경을 가로막게 돼 그럴 수도 없고, 그냥 두면 휑하니 아깝기도 해서 지난해 세 고랑짜리로 서너 평 되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을 지으면서 대지 공사를 할 때 어디 바닷가 모래를 파다 메꾸었는지 몰라도 도대체 작물이 자라질 않았다. 봄에 심은 상추 모종이 가을까지 그대로 자라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마치 박제해 놓은 것처럼 그대로였다. 그래서 지난가을부터 겨울 동안 산에 가서 부엽토를 파다가 교반하면서 작물이 자라기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땅속 깊이 파고 거기에 개똥이나 음식물 찌꺼기도 넣었다. 올핸 대여섯 평으로 좀 더 넓혀서 가지, 오이, 토마토, 상추, 부추, 당근 등을 심어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잔디를 파내고 경계석을 묻어 흙이 넘치지 않으면서 잔디밭과 구분되게 해야 한다.

 

지난해는 집에서 왕복 40킬로미터를 달려가서 오이, 토마토, 참외, 고추를 재배했는데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었다. 논밭이 있는 멧골까지 가서 씨 뿌리고 물 주고 풀 뽑고 수확하러 다니느라 속된 말로 개고생했다. 아내와 난 진드긴지 흡혈 파리인지 뭔가에 물려 지금도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멧골까지 해발 520미터의 비행기재를 넘어 다녔는데 여름에 70년 만의 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길이 무너졌다. 그 덕분에(?) 왕복 20분이나 더 걸리는 말티재로 돌아다녔는데 그마저도 산사태로 끊겨서 한 시간씩이나 남원~오수~멧골로 돌아다녀야 했다(다행히 작년 겨울에 임시 개통이 되어서 오가는데 1시간이면 족하게 되었다). 40킬로미터 거리의 멧골밭에 가서 딸랑 오이 서너 개, 호박 서너 개, 고추나 몇 개를 따오면서 ‘이걸 따려고 여길 왔다 갔다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물론 멧골에 가면 조광복 동지가 있어서 늘 막걸리 마시고 놀다 오는 즐거움도 있었는데, 올핸 그마저도 없다). 그래서 올핸 간단히 뜯어 먹을 건 바로 집 뒷마당에 심어 먹을 생각이다. 문전옥답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두 번째는 지난해 산사태로 잠기면서 폭삭 망했던 멧골 논밭을 복구해야 한다. 산 아래 저수지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땅이었건만, 여기도 지난해 폭우로 뻘흙과 모래가 수십 센티미터나 뒤덮여서 아무 작물도 심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요새 틈틈이 멧골에 갈 때마다 삽 한 자루 움켜쥐고 우선 하우스 안의 흙을 파 뒤집고 있다. 30센티미터쯤 파면 지난해 농사지었던 흔적인 비닐이 나온다. 비닐을 죄다 끄집어내고 모래와 뻘흙과 비닐 아래 원래 흙을 섞어서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엔 3월 초에 감자를 심을 생각이라 시기가 촉박하다. 하우스 정리가 끝나면 하우스 밖 밭에 쌓인 뻘흙과 모래를 쟁기질해서 뒤집고 퇴비를 섞어줘야 한다. 이건 삽질로 할 수 없어서 마을 어른들께 트랙터로 심경쟁기질을 부탁할 생각이다. 쟁기질은 논밭을 뒤집어엎는 일이고 로타리는 뒤집힌 흙을 곱게 부수는 일이다. 그러고 나서 관리기로 골을 내면 작물을 심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워낙 모래가 많이 떠내려왔기에 뭘 심어도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으니 땅콩을 심어야 할지 어떨지 고민이다.

 

하우스 정리가 끝나면 하우스 뒤편 도랑 옆 언덕배기의 가시넝쿨을 제거해야 한다. 올해부터 산기슭이 시작되는 부분에 목련꽃이나 사과나무 다래나무를 심을 생각이다. 시골에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돈 주고 사 먹는 일은 하지 말자는 생각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무 심을 자리를 잘 다듬어야 하고 거기에 퇴비를 많이 주고 묘목을 정성스럽게 심어야 한다. 기슭의 덩굴을 제거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낫을 들고 후려치면 낭창낭창한 가지가 낫에 맞아 잘릴 듯 휘어지면서 오히려 내 손등이나 뺨을 때린다. 나무에 가시가 있는 넝쿨이라 손등이나 얼굴을 스칠 때면 가시가 긁어버려 상처가 생긴다. 그러면 거기엔 또 피부병이 돋아난다. 그렇다고 예초기로 마구 헤집어도 잘 잘리지 않고, 집게 가위로 일일이 베어내기도 쉽진 않다. 찔레나 장미 넝쿨은 잘라내고 뿌리를 파내야만 다시 싹이 나지 않는다. 암튼 이것도 4월 식목일 전에 끝내야만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논두렁도 폭우에 휩쓸려 내려왔으니 성토를 하고 둑을 쌓아야 하고, 집 뒤편 수돗가도 비를 맞지 않도록 작은 창고를 만들고 지붕을 씌워야 한다. 또 뒷산에 가서 봄이 오기 전에 참나무 겨우살이도 따와야 하고 우슬도 캐고 칡도 캐야 한다.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면서 이런저런 고민 속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던 때는 눈보라 펑펑 날리던 영하 23도의 한겨울이었는데 그게 엊그제 같다. 주변에 눈이 녹자마자 그 속에서는 봄 냉이나 곰보배추가 벌써 눈을 내민다. 이럴 때면 내 맘은 점점 바빠진다. 무엇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이것저것 마구 일을 벌이게 되는데, 지금도 수돗가 창고 만들기를 벌려놓았건만, 멧골로 가서 하우스 흙도 파내고 논둑도 손봐야 하지 않냐고 맘속의 악마가 유혹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내가 맘먹고 하고자 했던 모든 계획은 머릿속에서만 진행될 뿐, 내 손과 발은 계획만큼 일의 진척을 이뤄주지 않는다. 그래도 좋은 건 무엇 하나에 매이지 않으니 좋고 자유롭게 맘이 가는 대로 놀든 일하든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않는다. 어쨌든 일의 완성이나 논밭의 준비 상태와는 무관하게 또 봄을 맞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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