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_우수상] 일개미처럼 살지만, 노동자는 아닌

by 센터 posted Feb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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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방송작가

 

 

“아랫것들은 아래에서 먹으면 되겠네요.”

4개월 남짓 함께 일하던 피디가 필자와 조연출에게 건넨 말이다. 말이 나온 이유는 이러했다. 출연자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점심시간이라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제작팀 2~3명이 따로 앉아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피디는 “출연자와 나는 여기에서 식사할 테니 조연출과 막내 작가는 따로 먹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랫것들은 아래에서 먹으면 되겠네요.”라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두 귀를 의심했다. 조연출과 필자는 황당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당황스러움은 창피함으로 변해갔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출연자도 분명 그 말을 들었으리라.

 

나는 방송작가다. 제작팀 안에서는 ‘막내’ 작가였지만, 출연자에겐 ‘취재’ 작가였다. 이틀에 한 번 출연자와 통화하며 그의 상태를 살피고, 특이사항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 그런 출연자 앞에서 나는 졸지에 ‘아랫것’이 되었다. ‘쿵’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폐부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아랫것’이라는 단어는 나의 처지를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화가 났다. 사과받고 싶었지만 사과할 피디가 아니었다. 악의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평소에도 ‘피디 말에는 막내 작가든 조연출이든 모두 복종해야 한다’라고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직업으로서의 방송작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의 형태는 대부분 프리랜서였다. 죽도록 일하는 일개미인데 노동자는 아니었다. 무료 노동법률사무소에 연락했다. 일하다 언어폭력을 당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구제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민사 소송을 해야 한다는 답을 받았다. 그렇다. 방송작가는 일하다 다쳐도, 언어폭력을 당해도, 성희롱을 당해도, 부당 해고를 당해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나는 분명 노동을 하고 있었다. 임금이 아닌 원고료를 받았지만, 월급 형태로 매월 10일에 입금이 됐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10~11시에 퇴근했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아이템 발제부터 자료조사, 출연자 섭외를 도맡았다. 피디와 메인 작가에게 보여줄 수십 가지 대안을 만드는 건 막내 작가인 나의 몫이었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도 나갔다. 그곳에서 출연자 상태를 점검했고, 때에 따라서는 출연자 가족도 돌봐야 했다. 지나가는 시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날도 있었다. 그뿐 아니다. 촬영이 끝나면 촬영된 테이프를 영상과 현장음으로 나눠 문서화시키는 ‘프리뷰’ 작업을 해야 했다. 전문 프리뷰어를 고용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내가 다니던 제작사에선 제작비를 아끼려 프리뷰를 모두 내게 맡겼다.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는 게 프리랜서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촬영 현장에 따라갔다가 VJ(비디오 저널리스트) 감독의 일당에 대해 들었다. 그는 “요새 다른 프로그램은 하루에 50만 원은 주는데 이 프로그램은 40만 원밖에 안 준다.”라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40만 원이라니. 그 돈은 당시 내가 다큐멘터리를 한 편 만드는데 받는 한 달 원고료였다. 다행히 3부작짜리 프로그램이라 달에 12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VJ 감독은 하루 일하고 40만 원을 받았다. 프로그램에 기여하는 정도는 내가 훨씬 높았다. 하는 일도 많았고, 물리적 노동 시간도 훨씬 길었다. 그런데 그가 하루 일하고 받는 돈과 내가 한 달 일하고 받는 돈이 같았다. ‘자괴감’은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아니까 싶다.

 

프로그램 제작을 마치고 CP(책임 프로듀서)와의 회식 자리가 마련됐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방송 만드는데 작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에 비해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다. 그래서 못 버티고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작가도 정규직으로 뽑으면 제작 안정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반말로 대답했다. “작가는 태생부터가 프리랜서야. 싫으면 다른 일 해.” 불만 있으면 일을 그만두라는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해를 보며 퇴근한 날이 없었다. 매일 야근을 했지만, 저녁 식대나 야근 수당은 없었다. 주말에 나와도 휴일 수당은 받지 못했다. 그뿐인가. 1년 넘게 일해도 퇴직금은 없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서러움이라는 게 폭발한다. 정규직에겐 한 보따리 쥐어지는 그 흔한 선물세트가 내 손엔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쥐어진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딸내미가 방송국에서 일한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지만, 그럴 때마다 괜한 죄책감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방송국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임시 인력일 뿐이었다.

 

지난 10년간 나는 ‘일개미 중 일개미’였고, 건강이 안 좋아 쉬어야 할 땐 연차를 쓰거나 병가를 내는 게 아닌 중도하차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이라면 한 달 일해 1일씩 얻는 연차휴가가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한 명이 두 명분의 일을 해야 하는 업계 특성상 내가 하루라도 빠지면 동료들이 힘들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아프면 알아서 빠져주는 게 이 바닥의 예의다.

 

방송작가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작사 면접을 보러 간 그날, 나는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다. 면접 올 때 노트북을 챙기라는 말은 ‘웬만하면 오늘부터 일을 시키겠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행복했다. 방송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경력도 없는 나를 선택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정적으로 쉬는 날은 하루도 없었고, 명절 연휴 등 빨간 날에도 일했다. 1주일에 2~3일은 제작사에서 밤샘 작업을 해야만 했다. 화장실에는 머리를 감기 위한 샴푸와 린스도 갖춰져 있었다. 식사는 근처 24시간 식당에서 무제한으로 시켜 먹을 수 있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건, 우리가 24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을 방증하는 거였다.

 

출근한 지 1주일이 넘도록 나는 내 월급이 얼만지 몰랐다. 혹시 ‘돈 밝히는 사람’으로 찍힐까 두려워 선뜻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동료인 막내 작가들과 친해져 서로의 월급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생겼다. 다른 막내 작가가 일러주길 내 월급은 70만 원으로 시작해 3개월마다 10만 원씩 오를 거라고 했다. 허탈했다. 우리는 최저시급을 각자 계산해봤다. 나는 시간당 1,930원이었다. 2011년 당시 최저시급이 4,230원이었으니 그의 반도 못 받는 거다.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방송작가로서의 내 인생도 끝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월급 70만 원 중 40만 원을 저금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막차를 타고 퇴근했고, 점심과 저녁은 제작사에서 해결하니 보험료와 교통비, 통신비 등을 제외하면 모두 저금할 수 있었다. 온종일 일터에 있다 보니 돈 쓸 일이 없었던 거다. 게다가 본가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월세 나갈 걱정도 없었다. 지방 출신이었던 다른 막내 작가는 80만 원을 받았지만, 월세 때문에 부모님께 매달 20만 원씩 용돈을 받는다고 했다. 하루 14시간 이상 노동을 했지만, 용돈을 받아야만 겨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푸념이 늘어지자 옆에 있던 인턴작가가 자신은 50만 원을 받는다며 하소연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는 9시 출근 6시 퇴근을 하며 3개월간 인턴으로 일했다. 그는 촬영 테이프를 문서화 하는 프리뷰 작업을 했는데, 제작사로선 고정 프리뷰어를 월 50만 원에 고용한 셈이었다. 만약 전문 프리뷰어에 맡기게 되면 월 200만 원은 더 지출되는 일이었다.

대우는 부당했지만, 일은 즐거웠다. 출연자들 인생 이야기를 듣는 일, 그걸 영상으로 만드는 일 모두 재미있었다. 시청자 후기 게시판에 제작진들 고생한다는 글이라도 올라오면, 힘들고 괴로웠던 감정이 모두 잊혔다.

 

그렇게 그 제작사에서 1년을 꼬박 채우고 다른 제작사로 옮길 수 있었다. 월급도 직전에 받던 것보다 10만 원이나 더 받았다. 기획안을 쓰는 일을 보조하는 일이었는데, 나도 메인 선배도 상근이라 제대로 배울 수 있겠다 싶었다. 일 자체는 즐거웠다. 선배 덕분에 퇴근 시간도 보장되었고, 자료조사를 하면서 세상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제작사 대표였다. 하루는 나를 불러 놓고 자기 아들 숙제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처음엔 거절했다. 작가 일도 아닐뿐더러 일을 시키는 대표의 태도가 ‘당연히 해야 한다’라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표는 10만 원이라는 구체적인 비용을 제시하면서 1차로 작성한 내용을 보기 편하게만 고쳐달라고 주문 내용을 바꿨다. 선배 작가도 용돈 벌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나는 결국 그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대표는 약속한 돈 10만 원을 끝내 주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에 선배에게 알렸지만, 그 역시 함께 받아낼 용기가 없었는지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며 나를 근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기당한 느낌이었다. 단돈 10만 원이었지만 배신감이 몰려왔다. 더는 제작사에서 일하지 않겠노라 마음먹고 그곳을 나왔다.

 

그 후 나는 본사 프로그램에만 이력서를 넣었다. 그곳에선 최소한 최저임금은 받을 수 있고, 돈 떼일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나는 작가 경력 20개월 만에 본사 프로그램의 취재작가로 가게 됐다. 우리를 위한 천국은 없었다. 작가는 사무실에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이었지만, 매일 자신의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 방문객이었다. 계약직 프리랜서 피디나 조연출에게도 쥐어지는 출입증이 작가에겐 발급되지 않았다.

 

그때 즈음 정부에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 표준계약서를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동자로 4대 보험 받는 건 아니지만, 억울한 일이 생기면 최소한의 방어막이 되어줄 계약서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그게 있으면 은행에서 조금이나마 대출을 받을 자격이 주어졌다.

 

본사 프로그램이 종영되자마자 곧바로 정부에서 운영하는 방송국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문제는 있었다. 이틀 출근을 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기존에 받던 원고료를 한참 낮춰야만 했다. 출근하는 날은 이틀이었지만, 매일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체계였다.

 

그래도 이 일을 시작하며 계약서라는 걸 처음 써봤다. 그 한 걸음을 내딛는 데 10년이 걸렸다. 일개미처럼 일했지만, 노동자는 아닌 삶을 살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친구들이 대리와 과장을 달 때 나는 서브 작가를 거쳐 메인 작가가 됐다. 이제는 후배들에게 밥 한 끼 사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목숨이다.

 

최근 MBC 보도국에서 일했던 방송작가가 자신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달라며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신청을 했다는 기사를 봤다. 나도 경제방송국 보도국에서 생방송 뉴스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무조건 출근해야만 했고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으며 팀장 피디의 지시를 받아 일하니 노동자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이외에도 많은 방송작가는 여전히 ‘프리랜서’로 일하며 노동 착취를 당하고 있다. 나는 10년 후에도 계속 방송을 하고 싶다. 그만큼 이 일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때는 휴가도 쓰고, 퇴직금도 받으며 진짜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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