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살이, 뭘 해서 먹고살까?

by 센터 posted Oct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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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명  시골에서 이것저것 하는 사람



시골살이의 가장 큰 어려움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돈+벌레”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돈벌이의 어려움과 자연적인 삶의 어려움을 포함하는 말이다. 고정적이고 필요한 만큼의 돈벌이가 정말 어렵다. 또 모기, 진드기, 깔따구 등 온갖 벌레에 물리면 퉁퉁 붓고 가렵다. 심지어 피 나고 곪아서 몇 개월이나 고생하기도 한다. 돈과 벌레는 시골살이 일 년을 지내면서 내가 생각해본 두 가지 큰 어려움이다.


귀농하기 몇 년 전부터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까를 고민했다. 처음 생각은 ‘적게 벌고 적게 쓰자’라는 원칙을 정하고 노는 것에 더 궁리했다.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4일은 노는 생활, 일 년 동안 봄, 여름, 가을만 일하고 긴 겨울엔 여행을 다니는 삶을 꿈꾸었다. 수입은 농사 조금 지어서 자급자족하고 날품팔이를 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먼저 귀농해서 사는 홀로살이 사람들이나 자연인을 만나서 가지게 된 생각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처럼 살아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는데 결정적으로 아내가 용납하지 않았다.


6~7년 전, 귀농을 결심하고 지역은 장수로 정했을 때 아내와 난 함께 장수를 둘러보러 갔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긴물찻집’이라는 산골 귀농인을 찾아가 그냥 무턱대고 “귀농하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사장은 언제 귀농할 것인지 물었고 3~4년 뒤에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그때 오라고 하면서 쌀쌀맞게 대했다. 수백 리 길을 귀농하려고 찾아온 사람을 냉대하는 모습에 무척 서운했다. 그래도 그다음 해에 또 찾아가고 매년 장수에 갈 때마다 찾아가면서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긴물찻집 사장님 하시는 얘기가 시골서는 보일러 기술이 있거나 집 짓는 기술이 있으면 먹고살 만하다고 했다. 아내는 그 말에 혹해서 내게 보일러 기술을 배우라고 했지만, 난 그 말을 들으려고 매번 찾아간 게 아니었다. 보일러 고치는 일보다 오히려 긴물찻집처럼 야생차를 덖어서 먹고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게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지금은 긴물찻집 사장님과 형, 동생 하면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지난해 농사를 지으면서 한 해의 소득과 지출을 따져보았다. 3월 감자 농사를 시작으로 쌈채류, 생강, 토란, 당근, 대파, 들깨, 서리태, 고추, 고구마 등을 심어 자급자족하고 남는 건 조금씩 팔았다. 그렇게 밭 700평과 논 100평 농사를 지었는데 원가 빼고 딸랑 100만 원을 벌었다. 주로 수입이 되는 작물은 감자와 생강, 들깨였고, 다른 건 큰 도움이 안 되었다. 농사로 먹고사는 게 이런 거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한 해였다. 그래서 올핸 농사보다 진달래나 목련꽃차를 만들고, 여름엔 오디를 따고, 가을엔 밤, 다래, 으름, 산감을 따서 소득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도 시기를 놓치거나 비가 억수로 오는 통에 재미를 보지 못했다. 거기에 감자는 재배 면적을 줄였기에 지난해만큼도 못 캤고, 생강, 들깨, 콩, 고추, 고구마는 폭우로 모두 잠겨 고사했다(그냥 폭망이다. ㅠㅠ)


농기계.jpg

농기계 실습 교육으로 경운기 운전을 했다.


장수로 귀농을 결정한 후 장수군청 사이트에 나오는 안내공고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공무직을 모집하는 채용 공고가 더러 눈에 띄었다. 그중에도 농기계 수리 업무에 대한 공무직이 내 맘을 끌었다. 딱 내 적성과 맞는 것이었고,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직업 같았다. 장수군에 7개 읍면마다 농기계 임대사업소가 생긴다고 했다. 기간제를 1~2년 하다 공무직으로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간제로 진입하기 위해선 농기계 정비 자격증이 필요했다. 나는 2018년 3월에 농기계 정비 기능사 이론시험을 보았고, 한 달 만에 합격하며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농기계 정비에 대한 실기를 배울 곳이 없었다. 그나마 경기도 농업기술원이나 농촌진흥청에서 실시하는 교육 훈련을 두 번이나 신청해서 실습도 받았지만, 실기시험을 준비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19년 11월이 되도록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거의 포기상태에 있었다. 그때 경주에서 농기계 실기를 족집게처럼 가르친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즉시 짐을 꾸려서 경주로 갔다. 카센터를 운영하면서 농기계 수리를 가르치는 학원이었는데 보통 두 달간 배운다고 했다. 나는 수강료 50만 원을 내고 속성으로 약 2주간 달방에 살면서 꽤 큰돈을 썼다. 매일 경운기나 트랙터, 관리기 등의 농기계를 뜯고 조립하면서 시험문제를 익혔고 드디어 12월에 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자격증이 있으니 공무직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020년 2월이 되면서 농기계 정비 기간제 모집공고가 나길래 미소를 지으면서 응시했다. 결과는 면접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니 그나마 시골서 먹고살기엔 공공부문 기간제가 제일 좋아 보였다. 월급 또박또박 나오고 일없으면 실업급여 받으며 몇 달 쉬다가 또 기간제를 할 수도 있다. 이젠 농기계가 아니라도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기간제 공고가 나기가 무섭게 지원했다. 산불 진화, 무슨 민원상담, 군유림 관리, 공공근로 같은 업무의 기간제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름 도시에서 세상물 먹고 내려오면 “어서 옵쇼” 할 줄 알았더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나처럼 아무 연고 없이 귀농한 사람이 지역사회의 공공일자리를 얻는 건 매우 힘들었다. 재수 삼수 사수를 해야 했다.


요새 난 공공기관에서 기간제로 일하고 있다. 일 년 정도 일하면 퇴직금도 나오고 좋겠지만, 그런 자리는 거의 없다. 짧게는 며칠에서 길어야 10개월 정도 기간제가 가끔 나온다. 다행히 운이 좋아서인지 6개월 기간제를 한 후 3개월짜리 기간제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 올해 말까지다. 내년은? 그건 내년 1~2월 쉬면서 또 지켜보다가 3월쯤 되면 기간제 일자리가 공고되니까 그때 고민해보기로 하자.


요새 산과 들로 다니며 꽃도 따고 나물도 캐고 유목민 같은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제일 행복하다.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살짝 바꿔보면 수렵 채집으로 사는 ‘노마디즘의 고차원적 회복’이라고 할까? 돈벌이는 그렇다 치고 자연이 주는 좋은 것들을 먹으면서 몇 년 지나면 면역력이 생겨서 풀벌레에도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 금강불괴를 볼 수 있으려나. 제발 그렇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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