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농사꾼의 바랭이농장 다섯 번째 일기

by 센터 posted Nov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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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복 청주노동인권센터 노무사 



8월 말에서 9월 초 무씨를 뿌리고 배추 모종을 심었다. 웬일인지 무 싹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작년, 재작년은 크게 자라진 않았어도 싹은 잘 나왔었다. 그나마 올 배추는 제법 튼실하게 자라줘 고맙다.


배추밭 고랑 둘레를 망으로 쳐주었다. 작년에 멧돼지가 내려와 배추 뿌리를 파헤쳐놔서다. 돼지는 가을 되면 밭에 자주 내려온다. 겨울 앞두고 살을 찌우느라 지렁이를 먹으려고 땅을 헤집어놓는 것이다.


배추가 좀 자라면 애벌레를 잡아줘야 한다. 저것도 생명인지라 처음엔 쯧쯧 하다가 이력이 붙었다. 애벌레 똥과 찐득찐득 벌레 먹은 자국들이 보이면 틀림없이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춘 애벌레가 있다. 배춧잎을 먹고 어떻게든 살아남아 훨훨 날아가는 건 애벌레 몫의 일이고 그걸 기어이 찾아내 발바닥으로 꾹 문질러 죽이는 건 내 몫의 일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 몫의 일을 다 해 살아가고 또 죽는다. 흙은 그 자체로 무기질이지만 흙의 표면은 자기 몫을 다한 풀과 벌레와 뭇 생명들의 시체가 썩어가고 또 그 시체를 먹고 살아가는 생명들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3년 넘도록 작물 한 번 제대로 못 거둬들인 내가 감히 논하기 그렇지만 나는 제초제와 농약과 화학비료로 생명의 현장이 파괴됐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해마다 밭을 갈고 두둑에다 비닐을 씌우는 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런 생명의 현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논쟁할 생각도 없고 내가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건 안다.


풀 속에서 참깨와 들깨를 걷어 1~2주 동안 햇볕에 말렸다가 털었다. 참깨는 갓난아이 손톱 같이 앙증맞다. 들깨는 뜬금없는 비유지만 가만 보면 거무튀튀한 색깔이라든지 둥그런 생김새라든지 꼭 태양을 도는 행성을 닮았다. 장일순 선생이 씨앗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했던가.


밭 끄트머리엔 그보다 더 우람한 풍채를 본 적이 없는, 동네 어른들 말씀으론 50년은 족히 됐을 거라는 밤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올 봄 밤나무 그늘에 표고목 30개 정도를 세워 놨다. 작년에 종균을 넣은 거라 올 가을부터는 버섯이 나온다는데 왜 감감무소식인지 쾅쾅 망치로 두들겨보기도 했다. 드디어 한두 개씩 고개를 들더니 10월 중순 넘으니 오락실 두더지잡기 놀이하듯이 여기저기서 표고가 나오고 있다. 삼겹살 파티라도 할까.


올해 6월 수확한 마늘 중 씨알 굵은 것들을 따로 보관해뒀다. 이제 마늘밭을 만들어야 한다. 내 밭은 500평 좀 모자라는데 작년엔 밭의 일부를 손쟁기와 쇠스랑이로 일궜지만 올해부터는 전혀 갈지 않고 있다. 무너진 두둑이 있으면 흙을 걷어 올려줄 뿐이다.


마늘밭도 갈지 않고 웃자란 풀을 톱낫으로 잘라준 후 똥과 음식물 삭힌 것을 두둑에다 뿌려주고 있다. 이 일을 마치면 마늘을 심는다. 유기농에서 밭을 갈지 않는 자연농으로 전환하는 단계다.


최근 LG하우시스 청주옥산공장에서 수년 동안 조직 내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을 받아 온 노동자 여섯 명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었다

죽고 싶었죠. 회사 호이스트에 목을 매면 이 고통이 알려질까.”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는 피해 노동자도, 기자회견 참가자들도 전부 목이 메어 눈물을 그렁거렸다. 노동조합에 협조적이라고, 그 협조적인 노동자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울렸다고, 군대식 조직문화에 융화되지 못한다고 그들은 함부로 취급당하고, 격리되고, 괴롭힘을 당했다.


풀이며 땅벌레며 뭇 생명들이 생명을 가꾸는 터전에서 격리되어야 하고 박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과 또 땀 흘려 일하는 노동현장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격리돼야 할 대상으로 낙인 찍혀 함부로 취급받는 것이 뭐가 다른지 나는 모른다. 아둔해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앞으로도 여력이 될 때까지 자연농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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